(히11:17-19)

나는 내 것인가, 나는 나를 책임질 수 있는가 – 이 질문은 철학적 질문이 아니다. 믿든 안믿든 실제적, 구체적, 현실적, 기초적, 기본적인 인생의 근본적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의 유무에 따라 갈등의 시간이 길어지는 인생, 짧아지는 인생을 살게 된다. 갈등은 효율과 비효율을 가른다. 갈등의 시간은 비효율의 시간이며 갈등 없는 시간은 효율적 시간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믿는 것이야말로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독생자를 드리는 시험 – 아브라함은 독생자 이삭을 드리는 시험을 받았다. 독생자가 누군가 하나뿐인 아들, 사람이다. 독생자의 보편적 의미가 있다. 나는 몇 명인가 단 한사람이다. 사람은 결국 자기 한 사람뿐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 하나와 하나님 관계의 문제다. 나를 하나님께 드리느냐 안 드리느냐가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문제다. 신앙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다. 각자가 하나님께 나를 드리는 시험을 통과 하느냐에 인생의 성패가 달려있다. 

시험 받는 자세 – 시험 받는 자세에서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시험이라는 문제에 앞서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시험 앞에서도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세, 시험을 복으로 여기는 자세, 이상한 것이 아닌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는 자세, 치욕이 아닌 영광으로 여기는 자세가 바로 시험에 앞서 하나님에 대한 바른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시험의 내용, 종류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자세가 중요하다. 

시험의 목적 – 매사에 하나님은 목적이 있다. 시험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최종적 목적은 믿음에 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확증하라,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줄을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13:5). 평상시보다 어려울 때 고난이 있을 때 확실히 알 수 있다. 좋은 상황보다 나쁜 상항에서 믿음의 여부와 상태를 알 수 있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 –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느냐의 시험이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분인가 소유권자가 누구냐에 따라 나의 사용 행위가 불법일 수도 합법일 수도 있다.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그분의 허락에 사용할 때 합법적 행위가 되고 하나님의 소유권을 모르고 부인하고 임의로 사용하면 불법 행위가 된다. 주인을 모르면 하나님의 명령이 불법적인 강요로 알기 쉽다. 달란트 비유를 보면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소유권(주권)의 근거 – (창조적 근거)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의 소유권은 당연히 하나님께 있다. 모든 피조물은 예외없이 하나님이 주인이시며 소유권이 그분께 있다. (구원적 근거)구원을 주신 예수님은 우리의 속죄를 위해 피 값을 지불하시는 속량물이 되셨다. 피로 값 주고 사신 바가 되신 것이다. (태생적 근거) 창조적 근거와 구원적 근거를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숙명적으로 태생적으로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신 것이다. 

제자의 시험 –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제자에게 예수님의 요구 조건이 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형제와 자매와 부모와 자식과 집과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10:29-30).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을지니라(마16:24) 결국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를 포기하고 예수를 선택하는 것이다. 나와 예수 둘 중에 포기와 선택을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구원의 확실과 불확실 – 구원의 확실과 불확실의 문제는 주인의 확실성 때문이다. 확실성에 따라 하나님이 주인인지 내가 주인인지 규명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책임과 나의 책임에서 책임 소재가 분명해지는 것이다. 구원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삶을 말한다. 하나님이 책임 질 수 없는 삶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삶이 있다. 구원이 확실한 삶은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에 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보다 하나님의 나라가 더 중요한 것이다.  

사명의 삶과 연명의 삶 – 구원의 확실성은 삶의 목적과 관련하여 중요성을 갖는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삶은 사명을 위한 삶이다. 반대로 나의 목적을 위한 삶은 연명을 위한 삶이다. 사명을 위한 삶은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는 삶을 말하고 연명을 위한 삶은 내가 하나님을 사용하는 종교적 삶을 말한다. 

사명의 삶과 하나님의 비전 – 하나님에 의하여 쓰임 받는 삶은 인간적 수준과 가능성을 넘어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된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삶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공급하고 보장하시는 삶으로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 비전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이다. 이것은 단순히 아브라함에게만 해당된 비전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주신 비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