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지 않는 씨앗이 꽃을 피울 수 없듯이 자존심 포기 없이는 생의 꽃 봉오리를 맺을 수 없다. 분명 이 세상에는 자존심도 지키고 목적도 달성 하는 그런 어리석은 공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공간이 충분히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자존심을 포기하지 않고 그야말로 자존심에 목숨을 건다. 자존심이 인생의 전부로 여기는 사람은 안하무인의 자세를 당연시한다. 안하무인의 사람을 세상은 결코 반기지 않는다. 스스로를 소외 시킬 뿐이다.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삶은 스스로를 매장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이 그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스스로의 매장이 썩으려는 시도가 아니라 썩지않으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성공은 필수적인 희생을 요구한다. 희생은 썩는 것을 말한다. 희생은자존심의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모름지기 우리는 낮과 밤을 동시에 보낼 수 없으며 봄과 가을을 동시에 즐길 수 없다. 캄캄한 밤이 지나야찬란한 아침이 찾아오고, 뜨거운 여름을 지나야 황금빛 들판으로 나설 수 있다. 인간은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산다. 욕심이 삶의 목적이 되고 동기가 되고 원인이 된다. 욕심과 욕심의 대결이 생존경쟁의 본질처럼되어있다.
선악과 유혹이 인간의 욕망을 자극시켜 범죄케 하는 사단의 함정이라는 사실을 인간은 까맣게 몰랐다. 선악과를 금단의 열매로 보지 않고 유혹의 열매로 보이도록 사단이 유혹한 것이다. 욕망을 자극하는 유혹을뿌리치지 못한 실수가 영혼을 상실하는 치명적 결과를 피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사단의 말을 듣고 나서선악과를 바라 볼 때 먹음직스럽고 보기에도 아름답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보였다.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은 사망에 사로잡힌 것을 망각했다.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이 사망에 사로잡히는순간인 것을 모르고 오히려 목적을 이루는 것으로 알고 기뻐했다. 기뻐할 순간이 아니라 통곡할 순간이었다. 심판대 앞에 서는 날 드디어 통곡하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꿈을 이룬 것처럼 기뻐하는 것이 불을 향해날아드는 불나방과 같은 모습이다.
욕망을 희생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야말로 죽을 것 같고 인생을 다 잃는 것 같고 포기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성경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고 하였다.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면 욕망의 노예가 되고 그것은 사단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사단의 노예는미끼를 물다가 낚시 바늘에 코가 꿰인 물고기가 낚시 줄에 끌려 올라가는 것과 같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자아를 죽이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살지 아니하고 밭에 떨어진 씨앗이 썩어서 많은 사람의 양식이 되는 곡식을 맺는 것처럼 남을 위해 살아간다. 그리스도 예수의 삶이 세상의 모든 영혼을위해 밀알이 되시는 삶을 사신 것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살지 아니하고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다.
나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자존심과 그 자존심의 목적이 되는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허락하신 상황에서 자신을 땅에 내려 놓고 흙 속에 묻히는 것이다. 흙 속에 묻혀진 여부는 자신이 나타나는지 안나타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무리 훌륭한 일을 했어도 절대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내가 했다고 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것을 조심해야 한다. 내가 나타나는 순간 나는 묻힌 것이 아니다.
옳고 그름이 충돌 할 때 자신이 분명히 옳아도 침묵해야 한다. 옳은 것은 옳다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 하는똑똑함 보다 옳고 그른 것 모두를 포용 하는 어리석음이 오히려 훌륭한 거름이 되고 억울함을 감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내 잘못도 내 탓이고, 당신 잘못도 내 탓이며 세상 잘못도 내 탓으로 돌리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인류가 살게 되었다.
진심으로 자존심을 포기하는 지혜로운 한 죄인이 주변의 사람들을 행복의 좁은 길로 구원의 좁은 길로 초대할 수 있다. 넓은 길은 자존심이 죽지 않아 남을 죽이는 사람들이 가는 길이고 좁은 길은 자존심이 죽어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길이다. 두 가지 길이 있다. 나도 살고 남도 사는 길, 나도 죽고 남도 죽는 길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