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9:1-6)
이끌려간 요셉 –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 의해 보디발 손에 넘겨진 요셉 뿐 만 아니라 인생은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구를 누구의 손에 붙였다는 말씀이 많이 나온다. 하나님의 손이 철저히 사람의 손에 의해 나타난다. 필연적인 인간 관계가 하나님의 손이 되는 것이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판단하게 된다.
노예로 팔려온 요셉에 대한 평가 –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어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인간적인 기준으로 보면 요셉은 불행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삶이 되었으나 성경은 그 반대로 말한다. 세상적인 형통의 기준으로 보면 요셉은 완전히 실패한 사람이다. 성경의 기준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여부가 형통의 기준이다. 세상의 기준은 소유 기준이지만 성경의 기준은 존재 기준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시점 – 요셉은 모태 신앙이다. 새삼스레 애굽에 와서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신다. 핵심은 요셉의 입장에 있다. 부족함이 없는 상황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자세와 절망적 상황에서의 하나님에 대한 자세가 같을 수가 없다. 노예로 팔려 생명조차 내것이 없는 요셉에게 있어 하나님은 생명의 전부, 인생의 전부가 된다. 하나님이 나의 일부냐 전부냐는 상황이 증명한다.
생존의 세가지 필수조건(관계) – 요셉의 경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 관계의 형통,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은 인간 관계의 형통, 요셉에게 재산과 사업을 맡긴 후 요셉을 위하여 그 모든 소유물에 복을 내리신 물질 관계의형통, 이 세가지 형통이 필수적이고 필연적인 생존의 기본 조건이 된다. 세가지 형통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수적인 형통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든 필사적인 각오로 하나님 관계부터 형통해야 한다.
필연적인 삼각 관계 –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와 나와 환경(사람, 물질)과의 관계, 하나님과 환경 관계가 있다. 나와 하나님 관계에 의해 하나님의 환경에 대한 결정이 정해지고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 환경(상황)의 상태가 결정된다. 그리고 환경의 상태가 나에게 반응하는 것이다. 환경에 나타나는 문제를 보면 나 자신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내가 환경과 상황을 직접 고칠 수 없다. 상황은 하나님만이 고치신다.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상태는 나를 보고결정하신 것이다.
환경의 역할 – 환경은 원인적 역할과 결과적 역할이 있다. 결과적 역할은 나와 하나님 관계를 증명하는 역할로서축복 또는 재앙이 나타나는 경우를 말하고 원인적 역할은 나를 연단하는 도구로 쓰여짐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 자신을 변화시켜 하나님 관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역할을 한다. 환경은 필연적인 생존의 현장이며 축복의현장이며 연단의 현장이다. 환경이 나에게 반응하는 것과 내가 하나님께 반응한 것이 일치된다. 그 반응이 나의상태를 증명한다.
상황의 파악 – 좋은 상황이든 나쁜 상황이든 상황 자체의 좋고 나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이 의미하는바가 무엇이냐에 있다. 상황을 파악하는 시각이 중요하다. 인간적 시각에 의한 파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상황을 허락한 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사람이 상황을 마음대로 Control할 수 있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러나 사람은 결코 상황을 Control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의 시각과 인간의 시각 – 사람이 조성한 상황이라고 하면 사람의 시각이 유효하다. 그러나 상황은 언제나하나님의 의도에 의해 허락된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하나님의 시각으로 봐야만 정확히 볼수 있다. 하나님이 그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을 사람들이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귀로 들으면서 듣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의 시각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시각과 인간의 시각 –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성령을 보내셔서 그의 모든 것을 깨닫게 하신다. 어떤영이 내 안에 있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의도와 일치된 깨달음이 가능하기도 하고 불가능하기도 하다. 영의 생각으로 보느냐 육의 생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일치된 방향으로 볼 수 있고 정반대 방향으로 볼 수도 있다. 육의 생각과영의 생각은 정반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약간의 차이가 아니라 정반대 방향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