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와 기도 ② (빌4:6-7)
염려의 오해 1 — <당연성> 염려를 자연스런 현상, 정상적인 현상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염려를 비정상적인 것, 이상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드물다. 성경은 ‘하라’와 ‘하지 말라’로 되어있다. 빌4:4절은 ‘기뻐하라’고 했고 6절은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 말라는 하는 것을 정상적인 것,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맞는가? 결코 당연하고 정상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신앙 생활을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겪는 갈등이 있다. 가치와 기준의 충돌을 겪는 것이다. 충돌은 당연한 것이다. 육적 세상적 기준과 영적인 기준인 하나님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염려의 오해 2 — <운명성> 염려의 원인은 문제 때문인 것은 상식이다. 그러기에 문제를 피할 수 없는 숙명의 특징으로 인하여 염려를 불가피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운명과 관련하여 분명한 것이 있다. 운명은 강요된 것이 아니라 선택한 것이다. 문제는 선택한 후에는 그 결과는 숙명적인 강요가 된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분명한 전제가 있다. 너희 앞에 생사화복을 두었은즉 오늘날 택하라는 것이다(신30:19). 하나님은 결코 강요한 적이 없다. 그리고 결과는 각자의 책임이다.
염려의 오해 3 — <필연성> 염려의 원인이 되는 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와 노력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 또는 파생현상으로 여기기 쉽다. 연구와 염려, 노력과 염려를 혼동하거나 동일시 해서는 안된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분명히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는 지적이다. 문제에 대한 반응인 염려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선택 사항인 것이며 그 후에 필연적인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염려의 오해 4 — <감정 문제> 염려가 감정 문제인 것은 맞다. 그러나 감정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 문제로 귀결되는 것이다. 일부에서 발생한 화재가 건물 전체를 태우는 결과가 되는 것과 같다. 감정의 손상이 결국 영적 손상으로 진행 되고 신앙 생활 전반의 실패로 확대되게 된다. 질병의 경우 역시 똑같다. 신체 일부의 감염에서 육신 전체의 감염으로 생명의 손상으로 확대되는 것이다.
염려의 생성 – 염려의 생성은 외부 상황에 존재하는 문제에 의하여 사람의 내부(마음)에서 일어나는 반응이다. 같은 상황이라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이유는 각자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시각은 당시 주어진 상황 때문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살아오는 동안 내면에 형성된 것이 시각을 결정하고 그 시각에 의해 상황을 판단하고 반응하는 것이다.
염려의 생성 – 시각의 형성에 결정적 요소는 듣는 말에 있다. 선악과 사건의 경우 선악과는 먹게 되는 이유가 뱀의 말을 듣고 나서이다. 개인적 추측으로 뱀이 한번으로 끝내지 않았을 것이다. 만날 때마다 거듭 말했을 가능성이 높다. 끝내는 그 말에 생각이 바뀌면서 결국 선악과를 먹게 된 것이다. 귀신 쫓은 예수님을 악평한 바리새인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4-35).
염려의 결과(마귀의 목적) – 엡4:27에서 분을 내어도 죄짓지 말고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하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마음의 상태는 틈이 생긴 것이다. 틈은 나가는 통로도 되고 들어오는 통로도 된다. 하나님의 은혜는 빠져 나가고 마귀의 시험은 들어오는 통로가 된다. 마음의 균열은 속히 회복되지 않으면 결국 간격이 생기고 시험에 들게 되는 기회를 마귀에게 제공하게 된다. 예배의 틈, 기도의 틈, 순종의 틈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염려의 결과(마귀의 목적) – 약1:6,8에서 ‘의심하는 자는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자로다’ 여기서 두 마음은 둘로 나뉘어진 마음을 말한다. 바람에 파도가 갈라지는 것처럼 마음이 둘로 나뉘어 결국 침몰하는 배와 같다는 말이다. 기도의 침몰, 믿음의 침몰을 말하는 것이다. 믿음이 침몰되지 않으면 누구도 침몰시킬 수 없는 인생이다(마7:24-27).
염려의 처리 – 벧전5:7-8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삼킬자를 찾나니’ 염려의 치명성은 마귀가 인간을 삼키는 수단이라는 것이다. 염려로 근심으로 낙심으로 삼키는 것이다. 문제를 맡기는 것이 아니라 염려를 맡겨야 한다. 염려를 맡기는 것은 마음을 맡기는 것이다. 마음을 맡기는 것은 나를 맡기는 것이며 나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다. 마음이 맡겨지지 않으면 문제도 맡겨지지 않는다.
염려의 처리 –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나의 보물을 어느 곳에 두었는가. 그곳에 내 마음도 둔 곳이다. 하늘인가 땅인가. 보화와 감추어진 밭이 있다. 자기 소유(물질과 목숨)를 다 팔아 그 밭을 살 수 있는가. 자기 소유보다 보화와 감추인 밭(교회)이 소중한가 아닌가. 염려와 문제를 맡긴 증거가 있다. 빌4:7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과 뜻을 지켜 주신다. 상황을 초월한 평강이 그 증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