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렬한 전사를 선택한 스파르타 300용사의 스토리는 전설 같은 사실이다.  기원전 480년경 스파르타 병사 300명이 페르시아 제국의 25만 대군을 맞서 싸운 것이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연합군 형성을 서로 미루고 있는 사이 싸워 보지도 못하고 전멸당할 위기 상황을 직감한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급히7천명을 동원하여 전장에 나갔으나 배신자의 방해 공작으로 다 퇴각하고 남은 300명으로 끝까지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다. 용맹 하기로 유명한 스파르타 병사들은 패배보다 죽음을 택한다. 

포기하고 투항하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비참한 것이라는 결론을 가지고 있다. 할 수 없었다는 이유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과 무능한 자의 궁색하고 비굴한 핑계이다. 비굴한 연명은 장렬한 죽음과 비교가 안 된다. 군인이라고 하면 ‘죽어도 결코 등에 총맞고 죽지 않으리라’ 는 결단이 있어야 한다. 스파르타 병사들은 화살이 등에 꽂혀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죽음을 각오한 스파르타 병사들은 칼을 무기로 삼지 않았다.  자기 자신을 무기로 삼았다. 무모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이 자신을 무기로 삼은 것은 자신의 능력의 전능함을 믿기 때문이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 하나님이 쓰시는 하나님의 무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의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예수님의 삶을 보라. 인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구원의 도구로 친히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다.  십자가는 육신의 일부가 희생되는 것이 아니다. 전부를 희생하는 것이다. 

죽음에 전부를 거는 것이 하나님께 전부를 거는 것이다. 나의 목적을 위해 전부를 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전부를 거는 것이다. 인생은 하나님에게 전부를 걸지 않으면 다른 것에 전부를 걸게 된다. 무엇을 위해 전부를 거는가에 따라 후회스러운 선택이 있고 영광스러운 선택이 있다.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것은 반드시 무너진다. 그것에 인생을 걸면 그것과 함께 무너진다.  절대적인 것에 인생을 걸면 무너지지 않는 그것과 함께 무너지지 않는 삶을 산다. 인생은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실패가 실패가 아니다. 

실패가 성공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나 적이 아니다. 실패는 성공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는 “승리에 필적하는 성공적인 패배가 있다”고 레오니다스  300용사의 장렬한 죽음을 평가하였다. 이 전쟁의 결과로 서양은 비로소 동방의 세력으로부터 벗어난다. 실패했을 때 상식적으로 확인할 것이 있다. 무엇에 전부를 걸었었나?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것에 전부를 거는 것은 실패에게 인생을 맡긴 것과 같다. 그러나 실패가 필요한 이유가 있다. 

실패 앞에 섰을 때 비로서 자신을 알게 되고 선택의 기준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아닌 것에 전부를 걸고 사는 것처럼 무모하고 무지한 삶이 없다. 하나님께 전부를 거는 사람을 세상사람들이 ‘무모하다 어리석다’ 고 한다. 과연 그런가? 세상 것에 전부를 걸든지 하나님께 전부를 걸든지 둘 중에 하나다. 무모하고 무지한 인생이 있고 담대하고 현명한 인생이 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지니라”(마16:24)는 말씀대로 한다면 어떤 각오가 필요 하게 되는가?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공통점은 자기 포기이다. 예수님을 따라가기 위해 내가 의지했던 것, 필요로 했던 것, 없어서는 안 되는 것 그리고 나 자신까지 포기해야 한다. 예수님께 영생에 대하여 물었던 부자 청년은 소유를 다 팔아야 하는 무모함을 도저히 따를 수 없어 뒤 돌아서고 말았다. 재산 포기와 영생 포기 중에 어느 것이 무모한 것인가를 고민한 결과는 영생 포기가 무모한 것이 아니라 재산 포기를 무모하게 보았다. 부자 청년은 영생 포기보다 재산 포기를 무모하게 보고 어리석은 결정을 했다. 

물질을 놓치지 말고 움켜 잡아야 성공이라는 것이 세상의 성공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것을 버리라고 하신다. 모든 것을 버리는 무모함을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를 포기하는 것과 세상을 포기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무모한 것인가? 어느 포기가 무모 한 선택인지를 모르는 것이 세상의 무지이다. 예수를 선택하기 위해 세상을 포기한 자는 나중에 알게 된다. 포기한 모든 것이 예수 안에 다 있다는 것을. 포기한 후에만 확인이 되기 때문에 포기하기 전에는 무모하게 보일 수 밖에 없다. 

이 무모함을 선택하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이 없으면 세상 포기를 무모하게 보고 예수를 포기하게 된다. 예수 선택과 세상 포기는 나의 삶의 주권을 예수께 양도하는 것이다. 삶의 주권 양도 이후는 예수께서 나의 삶을 주관하는 것이다. 내 삶을 내가 주관하는 것과 예수님이 주관하는 것, 어느 것이 현명한 선택인가? 삶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는 것과 예수께 있는 것 중에 어느 것이 현명한 것이며 어느 것이 무모한 것인가? 선택은 둘 중에 하나다. 현명한 선택 아니면 무모한 선택이다. 현명한 선택인 줄 알았으나 무모한 선택이 있고 무모한 선택인 줄 알았으나 현명한 선택이 있다.  무모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시각은 믿음의 시각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