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14:10-13)

장애물과 함정의 보편성과 필연성 – 앞에는 홍해, 뒤에는 바로의 추격으로 진퇴양난의 상황은 정확히 함정이었다. 바로가 추격을 결심한 것도 홍해 앞에서 고립된 상태를 알았기 때문이다. 인생의 여정에는 이러한 절체절명의 상황이 반드시 있게 된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공통점이 바로 이러한 상황에 직면했던 사람들이다. 홍해에 직면한 사람들은 부인할 수 없이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순탄한 상황보다 역경이 축복인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상황의 돌파 방법 – 상황의 돌파를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은 실제적 물리적 방법이 아닌 마음의 문제를 말씀하신다. 상황의 문제는 사람의 능력으로 불가능하다. 마음의 문제는 내가 할 수 있다. 성경 전체의 명령은 내가 할일과 하나님이 하실일이 구분되어있다. 나의 할 일과 하나님의 할 일이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실수라 해도 용납이 안된다. 각자의 역할이 바뀔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생의 기본 원칙이 각자의 임무와 역할을 명확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두려움의 함정 – 홍해라는 상황의 장애가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장애가 문제라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이 있다. 언뜻 눈에 보이는 환경이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보이는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문제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하신다. 언제나 마찬가지다. 육신적 물리적 문제보다 영적 혼적 문제가 핵심적인 문제다. 사망의 세력을 잡은자 마귀는 무서워하는 영혼들은 사로잡아 자신의 노예로 삼는다. 환경의 장애가 있든지 없든지 마음의 장애가 행동을 방해한다.

두려움의 함정 – 두려움은 자기 보호의 본능적 반응이다. 자기 보호적 반응인 두려움이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가두는 역할을 한다.나도 모르게 두려움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갇힌 상태를 모르고 살게 된다. 육체적 감옥은 의식 하지만 마음의 감옥은 의식하지 못하는 맹점이 있다. 두려움에서 나오는 것은 남의 대신할 수가 없다. 본인이 나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무서움에 붙잡힌 영혼을 자유케 하려 하심에 있다.

원망의 함정 – 원망의 심리는 나의 잘못이 아니라 남의 잘못에 대하여 원망하는 것이다. 나의 잘못은 없고 남의 잘못 때문에 이런 상황에 놓였다는 것이다. 불행도 실패도 남의 잘못이 문제라는 것이다.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 빠지는 함정이 자신은 잘못이 없다는 함정이다. 모든 것이 남의 책임이고 잘못이면 나는 당연히 잘못이 없으므로 감사할 일도 고마워할 일도 없는 것이다. 그토록 잘못이 없으면 당연히 실패도 불행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는 그 반대다. 항상 문제가 끊이지 않고 불행이 끊이지 않는다.

원망의 함정 – 모든 문제의 책임은 상대에게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 선악과 사건 직후 하나님의 추궁에 아담은 대답하기를 ‘하나님이 주셔서 함께 하게한 여자가 주어서 먹었습니다’ 이 대답은 은근히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뉘앙스가 풍긴다. 이런 논리는 지옥에 갈 잘못이 없다는 결론도 가능해진다. 광야에서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듣고 하나님은 “너희 말이 내게 들린대로 시행하리라”고 하신다.

불평의 함정 – 불평의 심리는 상대의 불완전, 불공평을 지적하는 행위이다. 상대에 대한 부정적 시각, 불신적 시각을 말한다. 불평은 나는 옳고 남은 틀렸다는 것이다. 상황은 부당하고 불합리하고 불법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여는 하나님의 처사를 그의 말씀도 그의 섭리도 부정하는 것이다. 나는 의롭고 나는 잘못이 없는 것이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완전한 존재라고 한다면 당연히 형통해야 하고 축복적인 삶이 되어야 하고 성공적 삶이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아마 그 반대일 것이다.

배신의 함정 – 하나님의 적극적 개입하신 기적으로 홍해까지 왔으나 목격한 상황에 충격을 받고 다시 그들은 애굽으로 돌아가려 한다.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아니라 자기들의 뜻으로 나왔고 홍해 앞에서 마음이 달라지자 다시 자신들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떠나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결정을 한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을 따라 왔고 가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얼마든지 배신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부인이 안되면 하나님을 부인하게 된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시인하느냐 그 반대냐

배신의 함정 –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예수를 따르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출발 전에 자기를 부인해야 예수를 시인하고 비로서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원어의 의미에 ‘배신’한다는 의미가 있다. 자기를 배신해야 예수를 배신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3)

가만히 있어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 내가 행하는 삶이 있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삶이 있다. 누가 앞에 가느냐에 중요성이 있다. 하나님이 앞에 가시며 인도하시는 삶이 신앙 생활이다. 내가 앞에 가는 삶은 정확히 말하면 신앙 생활은 아니다. 종교 생활은 내가 앞에 가는 삶이다. 내가 앞에 가면 내가 힘들게 해야 하고 결과는 흡족하지 못하다. 하나님이 앞에 가시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행하시기 때문에 힘들지 않고 결과는 형통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