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친구가 걸어서 사막을 횡단하게 됐다. 타는 듯한 태양의 열기를 견디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던 중 말다툼을 벌이게 됐다. 사막은 특정한 사람의 인생 여정이 아니다. 모름지기 모든 인생의 여정이 동일하다. 사막처럼 인생은 견디기 힘든 상황의 연속이다. 낮에는 태울 것 같은 폭염으로 힘들고 밤에는 추위가 겨울보다 매섭게 느껴지는 극과 극의 상황이 반복되는 곳이 사막이다. 극한 고통의 상황은 사람의 이성으로 통제하기 보다 감정적 반응이 폭발적으로 나타나게 한다.  

한 친구가 홧김에 다른 친구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나쁜 말을 들은 친구는 마음에 상처를 입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그냥 조용히 모래 위에 뭔가를 쓰기만 했다. “오늘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내게 욕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마음을 진정 시킨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가다가 오아시스를 우연히 발견했다. 갈증을 푼 두 친구는 거기서 목욕까지 하기로 했다.

그런데 목욕 도중 아까 욕설을 들었던 친구가 갑자기 늪 같은 수렁에 갇혀 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발견한 다른 친구가 그를 구하려 달려갔고, 천만다행으로 구출해내는 데 성공했다. 하마터면 익사할 뻔했다가 목숨을 건진 친구가 이번에는 돌 위에 뭔가를 썼다. “오늘 나는 가장 친한 친구 덕분에 죽음을 면했다.”

그러자 돌 위에 새겨진 글자들을 바라보던 친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내가 너에게 나쁜 말을 한 사실은 왜 모래 위에 쓰고, 내가 네 목숨을 구해준 일은 왜 돌 위에 쓰는 거야?”

친구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정겨운 표정으로 대답했다”누군가가 우리에게 잘못을 범했을 때는 그걸 모래 위에 써서 용서라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게 하고,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고마운 행동을 해주면 그건 돌에 새겨 놓아 어떤 바람도 영원히 지우지 못하게 하는 거야.”

파란만장한 광야 여행을 마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강조하신 것이 하나님과 그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돌판에 새겨 모세에게 주시고 40년 동안 십계명 돌판이 실린 법궤를 메고 행하게 하셨다. 40년 동안 매일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언약궤를 따라 살았다. 

특히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 후에 하나님과 그의 은혜를 잊지 말라고 강조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백성의 생존을 위해서였고 하나님의 형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백성의 형통을 위해서였다. 하나님을 잊는 원인이 있다. 가나안에는 각종 우상이 즐비한 우상 소굴이었다. 우상 소굴에서 우상의 영향을 이겨내는 비결이 불모의 사막에서 생존케 하신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는 것은 하나님을 배신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그 결과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돌판에 십계명이 새겨진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말씀은 우리 심령의 돌판에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말씀이 새겨져야 한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3:3)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고후3:7-8)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순간 순간마다 감사하며 끊임없이 찬양하게 하는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않고 기도할 수 있게 한다. 반대로 마귀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게 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며 배신하여 멸망의 길로 가게 한다. 

육적 신앙과 영적 신앙의 차이는 다양한 차이가 있지만 은혜와 원한에 대한 기억에서도 정반대의 차이를 보여준다. 성령의 역사는 원한은 잊고 은혜는 잊지 않게 하고 마귀의 역사는 은혜는 잊고 원한은 잊지 않게 하여 원수를 갚게 한다. 원수를 용서하는 길은 다같이 사는 길이고 원수를 갚는 길은 다같이 멸망하는 길이다. 무엇을 잊고 무엇을 잊지 않느냐가 다같이 사는 길이 되기도 하고 다같이 망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