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34-38)

궁극적인 인생 문제 – 무덤에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살아있는 사람은 문제없는 사람이 없다. 문제는 최초에도 최후에도 누구의 책임이냐 하는 것이다. 모든 문제의 결론은 누구의 책임인가이다. 문제 발생 원인이 내가 아니라 남에게 있는 경우도 결과적으로 책임이 나에게 있다. 문제 발생이 반드시 내가 원인이 된 경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에게 있는 경우가 더 많다. 공동체 운명에 있는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문제의 원인을 갖고 있지 않다.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구성원 전체가 문제의 원인 되는 것이다. 

나의 책임, 남의 책임 – 어린 시절 부친의 별세로 가족 전체가 불행했던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 낳아주신 부모도 자녀를 책임지지 못하고 피를 나눈 형제도 조상이 같은 친척도 책임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더 기가 막힌 사실은 나 자신도 나를 책임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창조주이외에는 책임적 존재가 없다는 것이다. 책임이 가능하려면 감당할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 능력이 피조물에게는 없는 것이다. 

마리아가 놀라는 이유 – 천사를 통하여 예수 잉태 소식을 듣게 된 마리아는 과학적 이유로 놀라고 율법적이유로 놀라는 것이다. 남자가 배제된 여자만의 잉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 때문에 놀라고 율법적으로는 더 심각한 결과가 초래하는 것이다. 율법에 기혼자의 간음은 남녀 모두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결과는 친정 가족 시집 가족 정혼한 남편과 본인까지 치명적인 불행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마리아의 입장이다. 이 불행한 결과가 너무 놀라운 것이다. 

수용과 거부 – 수용과 거부의 결과는 정반대이다. 예를 들어 복음과 예수를 받아들이려면 집이나 부모 형제 자매 어미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리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를 수용하면 가족을 버리는 불행과 고통의 위험을 각오해야 하고 예수를 거부 하면 그러한 불행과 고통이 없는 안전하고 평안한 삶이 보장된다. 

하나님 예배와 우상 숭배 – 바벨론에서의 시험에서 극단적인 시험이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시험이다. 우상 숭배를 강요 당하는 상황에서 숭배 거절은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위험을 각오해야 하고 우상 숭배 하면 불구덩이에 들어가지 않는 안전과 평안이 보장된다. 인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선택이 있고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선택이 있다. 

기도 금지법을 지키는 선택, 지키지 않는 선택 – 바벨론 권세자들의 종교적 핍박 앞에서 기도금지법을 어기고 기도하는 죽음의 위험을 각오하는 선택이 있고 기도 금지법을 지키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사자밥이 되지 않는 안전과 평안이 보장되는 선택이 있다. 책임을 져야하는 선택이 있고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선택이 있다. 위험한 선택이 있고 안전한 선택이 있다. 

타협하는 선택, 타협하지 않는 선택 – 신앙 생활은 교회 안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 밖의 세상에서의 삶이 포함되어 있다. 문제는 세상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법과 세상 법의 충돌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충돌이 있을 때 세상의 요구를 따라 하나님의 법을 양보하느냐 하나님의 법을 따라 세상의 이해관계를 포기하느냐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타협하면 위험이 없고 모든 것이 평탄하다. 반면에 티협하지 않으면 불이익이 있고 고난이 있다. 

타협의 쟁점은 말씀대로 할 것인가 생각대로 할 것인가이다 – 말씀대로 하든지 생각대로 하든지 필연적으로 결과를 확인하게 된다. 사필귀정이다. 구원도 축복도 성공도 실패도 사필귀정이다. 형편과 사정 때문이라고 변명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핑계와 변명이 결과를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있다. 어떤 경우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책임지는 사람, 내가 책임지는 사람 – 하나님이 책임지는 사람은 말씀대로 한 사람이며 하나님이 사용한 사람이다. 내가 책임지는 사람은 내가 나를 사용한 사람이다. 사용자는 사용한 것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사도 바울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한다는 의미로 생각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을 사용한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 사람을 사용하는 것이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 – 성전 미문 앞에서 앉은뱅이를 예수 이름으로 일으킨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이 베드로와 요한을 사용하셔서 앉은뱅이를 일으킨 것이다. 말씀대로 하는 것도 내가 말씀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사용하는 것이다.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가 – 구원은 누가 누구를 책임지느냐의 문제다. 신앙 생활이 힘들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예수를 책임지려는 사람이고 신앙생활이 쉬운 사람은 예수님이 나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구원이야말로 예수님이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것이다. 죄악으로 사망이 결정된 인생을 누가 책임져 줄 수 있는가. 주님 밖에 없다. 주님의 은혜만이 유일한 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