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1:6)
(자격 ①) 하나님의 부르심 – 본문의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의 의미는 기독교 신앙의 대전제가 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이지만 누구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또는 나아오는 자격이 있다. 고전1:1-2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및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부르심에 의하여서이다.
(자격 ②) 하나님의 택하심 – 누가 누구를 택한 것이냐의 문제가 있다. 하나님과 인간 관계에서의 관계 설정에 결정적 질서 문제가 된다. 택하심의 방향이 복음으로 구원받는 기독교와 일반 종교의 결정적 차이가 된다. 일반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면 기독교는 신이 찾아오신 것이요 사람이 신을 택한 것이 아니요 신이 인간을 택한 것이다. 일반 종교는 사람이 신을 택하고 심지어 신을 만들어 섬기는 것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15:16)
(자격 ③)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의 자격 –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구원을 위해 사람을 부르러 오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한 적이 있다. 죄인들과 어울린다는 갓이다. 이 말에 대하여 예수님이 대답하신 말씀이 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자에게 필요한 것처럼 인자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느니라”(마9:11-13)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바리새인들은 죄인들을 멸시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제외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다.
죄인의 자기 인식 –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죄인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이다. 인류 전체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원받는 숫자가 많지 않은 이유는 죄인임을 모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죄인임에도 철저히 의인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리와 창기는 자신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철저히 알고 있었고 가슴을 치며 통회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다. 하나님의 구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요 통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시51:17)
죄인의 자기 인식 – 죄인은 자신을 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22:6) 죄인의 타락 모습은 롬1:23에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으니라(롬1:23) 귀신 들린 딸로 인하여 예수님을 찾아온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의 모욕적인 말을 듣고 ‘개’라는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죄인임을 자백하는 자세는 어떠한 모욕적인 대우도 전혀 거부하지 않고 받아 들이는 것이다.
파산한 인생 – 심령의 가난 자는 정확히 설명하여 파산자이다. 파산자는 소유적 파산이 아니라 존재적 파산자를 말한다. 외적, 상황적 파산과 아울러 내적 심령적 파산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상황적 파산을 허락하는 이유는 심령의 파산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광야 길 40년을 걷게 하신 목적을 말씀하신다. 낮추시고 주리게 하시며 시험하신 목적을 알아야 한다. 죄인인 인생은 파산이 확정된 존재라는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구약시대의 파산은 본인은 물론 처와 자식까지 노예로 팔아서 빚을 갚아야 했다.
파산을 아는 인생 – 파산을 아는 인생과 모르는 인생이 있다. 파산을 아는 인생은 죄인임을 아는 인생이고 모르는 인생은 죄인임을 모르는 인생이다. 숙명적으로 죄인은 죄의 삯인 사망이 정해져 있는 파산 확정자이다. 누구나 필연적으로 인생의 끝에서 파산자임을 알게 된다. 그 이전에 깨닫는 것이 은혜요 축복이다.
믿음이 목표인가 출발인가 – 믿음 생활은 믿음으로 살고 있는 것을 말한다. 믿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은 믿음이 목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하여 시작된 삶을 말한다. 믿음은 약한 단계에서 강한 단계로, 작은 단계에서 큰 단계로 점진적 발전하는 목표적인 문제가 아니라 믿음은 출발의 문제이다. 구원의 시작은 믿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구원받은 삶이 믿음의 삶이다. 믿음에서 시작되어 믿음으로 마치는 것이 구원받은 삶이다. 적은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의 종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음에 대한 책망이다.
믿음은 연습인가 결단인가 – 연단 때문에 믿음이 많은 훈련 과정을 거쳐야 완성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많은 연단은 믿음을 확실히 하는 확인 절차이다. 반복된 시험은 반복된 확인을 말하는 것이다. 이삭을 바치는 사건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실력이 향상 되어 비로서 합격한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서 결단한 것 뿐이다. 이삭 자신은 하나님이 정하신 장소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훈련과 연습할 시간이 없었다. 그 즉시 결단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것 뿐이었다. 불구덩이 앞에서도 사자굴 앞에서도 그랬다.
마음의 믿음과 입으로 시인 – 마음에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쉽고 어느 것이 어려운가,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나중인가, 마음에 믿어져야 입으로 시인할 수 있다. 믿어지면 시인할 수 있는가? 로마 황제 앞에서 예수라는 다른 왕이 나의 왕이라고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에 믿는 것은 실제적 충돌이 없으나 입으로 선포하는 것은 엄청난 충돌을 각오해야 한다. 불구덩이 앞에서 금신상 숭배를 거부하는 선포를 하는 것을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