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9:1-6)
존재 형통과 환경 형통 – (계3:7-8)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니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을 믿든지 안 믿든지 인정하든지 안하든지 인생의 문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출생할 때도 태의 문이 열려야 하고 죽은 후에도 무덤 문을 열어 주어야 들어갈 수 있다. 천국 문도 오직 예수님의 손에 의해 열린다.
하나님 관계의 형통(생명의 형통) – 구원이 필요한 이유는 인생의 생명이 단절 되었기때문이다. 생명의 불통은 하나님 관계의 불통에서 왔다. (창2:17) “선악과를 먹지 말라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말씀에 대한 거부는 하나님에 대한 거부이며 생명에 대한 거부이다. 하나님을 거부한 인간의 특징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에서 생명과 열매의 존재는 나무에 붙어있는 것 한가지 뿐이다.
하나님 관계의 형통(영의 형통) – 영적 형통은 하나님의 영과 나의 영의 일치를 말한다. (롬8:14-15)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우리가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느니라” 마귀의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 있다. 두 가지 영 가운데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는다.
하나님 관계의 형통(생각의 형통) – 두가지 영이 있고 따라서 두 가지 생각이 있다. 영의 생각과 육의 생각이 그것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지만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생각의 정체는 말씀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4:6) 영은 생각을 결정하고 생각은 말씀에 대한 반응을 결정한다.
하나님 관계의 형통(시각의 형통)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을 사람들이 보면서도 보지 못하고 들으면서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영적 시각, 영적 청각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각이 열리지 아니하면 상황 분별과 해석이 불가능하다. 상황 해석에 따라 하나님의 방향과 일치할 수도 반대일 수도 있다. 애굽에서 요셉을 만난 형들과의 대화에서 해석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사람에 의해 팔려간 것이냐 하나님이 보낸 것이냐로 달라진다.
하나님 관계의 형통(기준의 형통) – 인간의 범죄의 핵심은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준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창3:22) 범죄한 인간이 불순종하는 이유가 자기의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자기의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는 것이 죄인된 인간의 삶의 모습이다. 평생 충돌이 불가피한 문제가 기준의 충돌이다. 인간적 기준과 하나님의 기준이 충돌하는 것이다.
두 가지 관계 형통(외적 형통과 내적 형통) – 외적 형통은 다양한 관계와의 형통이 필요한 영역이고 내적 형통은 유일한 하나님 관계의 형통이다. 다양한 관계의 형통을 위해 동분서주해도 불가능한 이유가 유일한 관계의 형통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영역에서의 형통을 위해 유일한 관계의 형통을 소홀히 하면 그 모든 관계의 형통은 불가능하다. 외적 관계의 형통 문제로 인하여 내적 관계의 형통에 장애가 되는 경우를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 관계의 형통의 증명 – 교회 생활의 형통과 사회 생활의 형통의 함수 관계가 있다. 사회 생활의 상황이 교회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사회 생활의 형통을 위해 교회 생활의 형통을 훼손하면 결과적으로 사회 생활의 훼손이 일어난다. 피치못할 사정이라고 변명할 수 있으나 사회 생활에 오는 훼손 현상을 막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형통케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관계의 형통 유지 방법 – 이삭이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뺏기면서 우물을 지키기 위해 싸우지 않고 양보하고 계속 파는 이유가 있다. 우물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경우 우물은 뺏기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관계는 치명적 훼손이 발생한다는 원리를 알고 있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원수를 미워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마귀의 자녀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마귀를 닮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야 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