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구원하셔야 할 책임도 의무도 없으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인간을 굳이 구원하시는 동기는 무엇인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배신으로 인한 아픔보다 우리의 멸망이 더 아프신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같다. 하나님의 인자 하심은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에 반영된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 나타나는 다양한 상황에 대하여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허락하심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볼 때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다. 자랑스러운 상황도 있고 비참한 상황도 있다. 행복할 때가 있는가 하면 불행할 때도 있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인생이 실감난다. 희노애락이 점철되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는 변함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불행은 부딪힌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아무리 절망스러워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변함없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변함 없다. 아무리 지옥같아도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손길은 변함이 없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상황을 보는 시각을 바로하는 것이다.
벼룩으로 인한 감사: 나치 독일의 포로 수용소에서 절망적인 나날을 보내던 코리텐 붐여사의 일화이다. 살을 에이는 추운 잠자리와 말할 수 없는 고문과 굶주림 등 견디기 어려운 수용소 생활이었지만 지옥같은 환경 가운데서도 믿음을 가진 몇 사람이 몰래 기도하며 성경을 공부했다. 성경을 읽는 중에 데살로니가전서 5장18절의 말씀은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벼룩이 많은 것은 도저히 감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벼룩이 많은 것도 감사할 조건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감방을 감시하던 병사가 자기들끼리 “감방 안에는 벼룩이 많아서 들어가기가 끔직하단 말이야 ” 라면서 “밖에서 슬슬 지키는게 좋겠군”이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순간 벼룩이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던 그들은 “벼룩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렸고, 그 덕택에 성경공부를 계속 할 수가 있었다.
참혹한 상황에서의 찬양: 1618년부터 30년간 유럽대륙을 초토화 시켰던 참혹한 “30년 전쟁”이 있었다. 끝없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 수없는 죽음의 슬픔 속에서 사랑하는 가족을 하루아침에 잃어 버리고 가정이 풍비박산되는 아픔의 세월 속에서 원망과 불평, 자학과 절 망과 자포자기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 같은데, 놀라운 것은 이와 같은 무서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은혜로운 찬송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17세기 말 음악가 환켄나우어가 30년 동안에 경건한 성도들이 입을 통하여 불려진 찬송가들을 수집해 보았더니 32,712곡이나 되었다. 몇 년 후에 음악가 웨첼이 다시 수집하니 55,500곡으로 늘어났다. 30년간의 처절한 전쟁 가운데서 어떻게 그들은 찬양할 수 있었을까? 평화로울 때 부르지 못하던 찬송이 성도들의 입을 통하여 샘솟듯이 쏟아져 나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그의 임재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들은 잠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느 병원의 심장병동에 걸려있는 한 무명의 “시”를 소개한다. 주님!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 주심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 되어 틀어지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그리하여 나의 교만을 깨닫고 회개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때로 아들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인간 된 보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먹고사는데 힘겹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눈물로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하고 한술의 밥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기 때문입니다.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나게 된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분명히 드러나 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슬픔과 아픔의 잔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렇게 감사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감사할 수 있음이 가장 큰 축복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청교도의 감사: 죽음을 무릎쓰고 대서양을 건너온 청교도들은 첫 겨울에 47명을 차거운 땅에 묻어야 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 도착한 그들은 인디언들의 잦은 공격과 질병과 추위와 배고픔과 싸워야 했다. 농삿꾼도 아니요 노동자 계층도 아니었던 그들의 고통은 말로 표현이 불가능했다. 빌려 타고온 배삯으로 인한 빚은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천국을 소망하여 찾아온 신대륙은 지옥의 시작이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청교도들은 미국에서 얻은 첫 소산으로 추수감사제를 드렸다.
이들이 추수감사를 바친것은 그 해의 수확이 대풍작이었거나 다가오는 미래가 무지개 빛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눈물과 탄식과 원망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는 정황이었다. 그들의 현실은 힘겨웠던 항해와 수많은 역경과 가족을 잃은 슬픔과 닥쳐올 원주민의 습격과 혹한과 폭설에 대한 걱정과 그 나마 힘겹게 거둔 초라한 수확을 앞에 놓고 드린 뜨거운 눈물의 감사예배였다. 청교도들이 역경 중에서 드린 추수감사예배는 기독교인 의 감사가 얼마나 역설적인가를 보여준다.
‘행복한 하루'(바네트 깁슨)에 이런 구절이 있다. “그대의 손바닥에 얼마나 많이 쥐고 있느냐는 그대의 행복과 관계가 없다. 그대의 마음 속에 감사한 생각이 없으면 그대는 파멸의 노를 젓고 있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공부가 있다. 다른 공부보다 먼저 감사할 줄 아는 방법을 배우라. 감사의 예술을 터득할 때 그대는 비로소 행복을 찾을 것이다. “왜 하나님은 굳이 모든 일에 감사하라고 하셨는가를 알 수 있다. 감사를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은 정말 고마우신 하나님이시다.”
